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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2년 만이네요, 아버지

정동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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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당신문
기사입력 2020-09-22

▲ 본인 이름 ‘귀복(貴福)’을 두고 굳이 ‘운해(雲海)’라는 예명으로 생전에도 불리기를 원하셨으니, 여기서도 그렇게 불러드리지요.    

[분당신문] 아버지, 실로 오랜만이군요.
마지막으로 뵌 게 초등학교 5학년인 1978년 6월 말일이었으니까, 42년 만이네요.
그동안 흙을 이불 삼아 지하에서 잘 계셨나요.

 

마지막 아버지를 뵈던 날, 그날은 비가 무지하게 내렸었지요? 아마 며칠째였을 겁니다. 땅을 파면 흘러내리고 파면 또 흘러내려서 동네 큰일 도맡아보던 현남이 형이 ‘아, 아저씨, 그렇게도 가기 싫으시냐’고 한 소리 하던 게 또렷이 기억나는군요. 상여꾼들과 장례식에 모인 이들도 전부 ‘아버지가 흙으로 가시니 하늘도 슬퍼하는 거’라며 함께 눈물콧물빗물 흘렸던 기억도 나고요.

 

정운해 씨.
본인 이름 ‘귀복(貴福)’을 두고 굳이 ‘운해(雲海)’라는 예명으로 생전에도 불리기를 원하셨으니, 여기서도 그렇게 불러드리지요.

 

직접 지은 예명에서도 알 수 있듯, 참 낭만적이셨어요, 아버지는. 경기도 여주군 대신면 장풍리 297번지, 삼 면이 산으로 둘러싸여 인적 하나 없던 그 골짜기에 재산 한푼 없이 달랑 어머니만 모시고 들어오면서, 계획이라고 어머니에게 내놓은 게 전쟁고아들 불러들여 산 개간하면서 함께 사는 거라 말했다지요? 그리곤 다랑이논 맨 위엔 호수 하나 만들어 배 띄우고 그 좋아하던 시인 이백처럼 한시도 읊으며 살겠다고요. 요번에도 가보니 아직도 그 연못 자리는 그대로 있더군요. 그 둑길에 서서 생전의 아버지를 잠시 생각했습니다.

 

어머니 돌아가시기 전에 몇 번에 걸쳐 삶의 마무리 인터뷰를 했는데, 치매의 와중에서도 두 가지만은 늘 강조하시더군요. 화장하지 말라는 것과 아버지와 합장하지 말라는 것. 화장하지 말라는 이유는 ‘뜨거울까봐’였기 때문에 내심 웃으며 흘리고 말았지만, 아버지와 합장하지 말라는 이유는 굳이 자초지종을 듣지 않아도 외아들인 내가 알겠기에 어머니와 새끼손가락을 걸었는데, 결국 이렇게 약속을 지키지 못하고 말았습니다.

 

마음이야 착하셨지요. 전쟁으로 오갈 데 없는 고아들 챙긴다는데 잘못됐다고 할 사람 누가 있었겠습니까. 그러나 그 넓디넓은 산골짝을 오로지 괭이와 삽, 호미와 쇠스랑으로 논밭을 일구는 데에, 아버지는 얼마나 일조하셨나요. 비록 저 어렸지만 어머니 혼자 여자의 몸으로 하루를 백날 삼아 농삿일하셨다는 것쯤은 잘 알고 있습니다.

 

뿐인가요.
복숭아, 포도, 배, 밤 등을 심고 대신면 안에서 유일한 과수원으로 서서히 자리잡아갈 무렵, 아버지는 일보다 과수원 안에 높다란 원두막을 짓고 한시와 노랫가락 부르면서 오가는 친우 분들과 술추렴하기에 바빴었지요.

 

버스나 다녔습니까. 새벽이슬 맞고 광주리에 고봉으로 복숭아 따서 머리에 이고 비탈길을 내려가던 어머니 뒷모습이 선연합니다. 오로지 발품으로 면 내 육십 리 길을 온종일 돌아다니고 밤늦게 돌아오는 어머니에게 아버지는 어떻게 하셨지요? ‘어디서 누구와 수작 떨다 이제 들어왔냐’며 갖은 욕설과 손찌검을 하곤 했더랬습니다.

 

어머니가 몇 번이나 친정인 포천으로 다시 가려 했던 것을 기억합니다. 여러 번 짐 보퉁이 싸는 것을 목도했지요. 앞에 앉아 가지 말라 우는 저를 보다가는 보퉁이 싸던 손으로 제 얼굴을 어루만지며 함께 끌어안고 울곤 하셨지요. 전기마저 들어오지 않는 그 캄캄한 골짜기에서 아버지와 단둘이 산다는 게 그렇게 두려울 수가 없었습니다.

 

돌아가시기 4년 전부턴 내처 누우셨지요. 마지막 이태 동안은 꼼짝 못하고 산송장이나 다름없었는데, 농사 짓기에도 바쁜 몸으로 매일 수발 드는 어머니를 보면서 경외감마저 생기더군요.

그러고 보니 아버지와 저, 부자간에는 대화다운 대화가 없었네요. 아버지 쉰여덟에 절 낳으시고 예순여덟에 이 자리로 돌아가셨는데, 마지막 4년은 말 한 마디 거의 못하셨으니 저 일곱부터는 아버지와 말을 나누지 못했던 거로군요.

 

부정(父情)을 거의 느끼지 못했는데도, 낭만과 술을 좋아하던 아버지를 그대로 빼닮은 걸 보니 이 피라는 게 한스럽군요. 적어도 제 아이들이 또한 저를 닮지 않도록 지금부터라도 잘 살아볼랍니다.

 

가외 말이지만, 이번에 이장을 하면서 발견된 동전 세 닢은 무얼 의미하는가 싶습니다. 일을 봐준 동네 수진이 형도 이장(移葬) 경력 17년 만에 이런 경우는 처음 본다지 않던가요. 노잣돈으로 입에 넣어드린 것까지는 같이 있던 작은누나도 증언했는데, 그것들이 절반씩 접혀 있던 건 무슨 까닭인지요. 혹자는 이제부터 ‘돈이 새진 않을 것’이라고 해석하던데, 맞는가요?

 

모쪼록 그곳에서나마 어머님과 잘 계십시오. 이승에서의 일 참회와 속죄하면서 잘해드리세요.
하여 저까지 함께 모이는 날, 그동안 못다 한 이야기 자분자분 나누기로 하시지요.  

 

아들 드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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