애덤 스미스는 그의 저서 국부론에서 '보이지 않는 손(invisible hand)'이 수요와 공급을 조절해 시장을 통제한다고 이야기했다. 자본주의사회에서의 자율성의 표현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경제 쪽이 아닌 정치 쪽에 이 용어를 가져다 사용할 때는 의미가 완전히 다르게 바뀐다. 같은 말이지만 정치가 개입되면 어딘가 모르게 음습한 분위기의 색채가 묻어난다.
자신의 실체는 드러내지 않은 채 베일 뒤에서 리모컨으로 조종해 자신의 목적을 달성하는 ‘검은 선글라스’의 사나이를 연상하게 한다. 떳떳하지 못한 방법임은 자명하다. 그래서 환영받지 못하고 발각되면 지탄받기 십상이다. 그런데 이 같은 ‘보이지 않는 손’이 정치 쪽에서는 비일비재하다는 것이 그 쪽에 몸담고 있는 인사들의 전언이고 보면 우리 사회의 어두운 단면이지만 존재를 부정할 수 없는 현실인 것 같다.
이것은 심증은 가지만 물증이 거의 없어 실체를 밝혀내기가 힘들기 때문에 단지 '설(說)'로써 회자되다 시간이 지나면 대부분 그대로 수면 아래로 가라앉는 게 보통이다. 어쩌면 투명인간 같은 '보이지 않는 손'은 소위 권력을 가진 쪽에서 전가보도(傳家寶刀)처럼 사용해 목적을 달성하는 비열한 수법의 전형이라는 해석에 대체적인 공감대가 형성되고 있다.
필자는 위에서 언급한 정치 쪽의 '보이지 않는 손'과 성남의 준예산 사태를 빗대어 생각해 보고 교훈을 얻기를 바라는 마음 간절하다.
먼저 새해 벽두부터 소동이 벌어지고 있는 성남시의 준예산 사태 발생과 관련해 그 진행 과정에서 무엇인가 석연치 않다고 느끼는 시민대중들이 적지 않은 게 사실이다. 전국 최초라는 성남시의 준예산 사태가 시의회의 파행에서 비롯된 것이지만, 이렇게 준예산 사태까지 오게 된 배경의 이면에는 '보이지 않는 손'이 개입됐기 때문이라는 분석도 나온다.
새누리당과 민주당 의원들 모두 최악의 준예산 사태만은 피해보기 위해 구랍 31일 소집된 임시회의 본회의가 정회된 상황에서 장시간동안 협상을 시도했던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수차례에 걸친 '밀고 당기는(밀당)' 협상 결과 양당간 첨예한 대립각을 세웠던 '도시개발공사 설립안은 6대 시의회에서 처리하지 않는다'는데 합의하고 문안작성까지 마쳤던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그런데 이 합의안의 잉크가 마르기도 전에 민주당측에서 합의안 문구 수정을 요구하고 나서는 등 이상기류가 형성되더니, 결국에는 합의안이 파기되는 돌발 상황이 발생하자 새누리당측의 본회의 등원 거부라는 카드가 현실화됐던 것으로 전해진다.
새누리당이나 민주당이고 간에 민주정치를 하겠다고 민의의 전당인 의사당에 모인 의원들이 상대방을 파트너로 삼아 대화와 타협을 통해 자신들의 손으로 직접 작성한 합의안에 대해 금방 휴지조각처럼 파기하는 모습을 보는 유권자인 시민들은 답답하기 그지없다. 그러면 왜 마라톤처럼 길고 지루한 협상 끝에 나온 합의문이 파기됐을까 하는 의문이 자연스럽게 생길 수밖에 없다. 바로 여기에서 '보이지 않는 손'의 개입설이 불거지면서 회자되고 있는 것이다.
구체적인 시나리오도 돌아다닌다고 한다. 그 내용을 들어보면 '합의문이 모처에 보고되니 그곳에서 양당 합의안에 대해 거부하면서 도시공사 설립을 계속 밀어붙여 통과시켜야 된다는 주문이 나왔다'라는 식의 '카더라 통신'이지만 일견 그럴 듯한 상황구성이라는 느낌이 들기도 한다.
그리고 준예산 사태 발생이후 성남시에서 벌어지는 상황들을 종합해 보면 아직도 '보이지 않는 손'이 계속 작동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에 고개가 갸웃거려진다. 공무원들이 총동원된 것처럼 느껴지는 가운데 인터넷상에서 페이스북과 트위터 등 SNS를 통한 대규모 여론전이 전개되면서 특정 정당을 몰아붙이는 형국이 필살기(必殺技)를 보는 것 같아 소름이 끼칠 정도다.
지방자치제라는 테두리 안에서 집행부와 지방의회는 미우나 고우나 같이 가야할 동반자일 수밖에 없다. 그런데 지금의 집행부 쪽 대응 방식을 보면 상대방은 안중에도 없는 모습이다. 대화와 타협보다는 오로지 상대방을 굴복시켜 빼앗아 오겠다는 타도의 대상으로 인식하고 있는 것 같아 '앞으로가 더 문제'라는 우려를 금할 수 없어 답답한 심정이다.
물론 보이지 않는 손의 속성상 '심증만 있고 물증이 없다'는 것이겠지만 이 같은 카더라 통신은 그래서 그런지 더 확대재생산 되면서 전파되는 양상이다. 항간에서는 'CC-TV와 스마트폰은 알고 있다'는 우스갯소리까지 나돌고 있다는 후문이다.
어찌됐건 만일 이번 준예산 사태를 촉발하게 된 시의회 파행에 '보이지 않는 손'이 개입했다면 지방자치제의 근간을 훼손하는 것으로, 용납할 수 없는 중차대한 문제가 아닐 수 없다. 만에 하나 카더라 통신의 시나리오대로라면 지방의회가 있으나마나한 존재가 아닐 수 없다. 집행부를 견제해야할 정당이 자신들의 합의문 내용을 모처(?)에 보고한 뒤 지침을 받는다는 것 자체가 우스꽝스러운 일이 아닌가. 단지 떠도는 낭설(浪說)이기를 바랄 뿐이다.
하지만 '아니 땐 굴뚝에 연기 나랴'는 속담이 있듯이 이런 시나리오까지 만들어져 떠도는 것은 그동안 시의회가 얼마나 시민들로부터 불신을 받고 있는가에 대한 반증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여당과 야당으로 편이 갈려 여당은 자당 소속 시장의 집행부에 대해 무비판적인 감싸기에 주저하지 않고, 야당의 경우도 건설적 대안 제시보다는 비판을 위한 비판에 맛을 들인 경향도 적지 않았던 점을 부인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그래서 시중에 떠도는 시나리오대로라면 시민의 대의기구인 지방의회를 상생의 파트너로 인식하지 않고 경시하는 검은 선글라스의 '보이지 않는 손'이 개입할 수 있게 만드는 여지를 자초한 측면도 없지 않다고 본다. 차제에라도 이런 '보이지 않는 손'이 지방자치제의 근간을 뒤흔들며 장난질을 치지 못하게 하기 위해서는 시민들의 선택을 받은 지방의원들의 대오각성(大悟覺醒)이 반드시 필요하다는 판단이다.
결국에는 유권자인 시민들이 선거에서 깨어있어야 한다는 결론에 도달한다. 잔꾀 부리지 않는 공직후보자를 자신들의 대리인으로 뽑아 민의의 전당인 의사당에 내보내야 한다. 그럴 때 비로소 '보이지 않는 손'과 권력의 장난질에 회유되지 않고, 돈맛에 눈멀지 않은 채 오로지 자신들을 의사당으로 보내준 유권자인 시민들만을 생각하며 정의(正義)와 양심(良心)에 입각한 의사결정을 내릴 수 있기 때문이다. 이번 성남시의 준예산 사태를 통해 유권자인 시민들이 얻어야할 교훈이 아닐까 한다.